지우고 싶은 세상 단상들

나는 지금 두 군데 전화할 데가 있다.

하나는 내 기술을 믿고 추진한 기술이전이 결국 실패했다는 연락을 해 온 절친한 선배에게...

다른 하나는 한 달이 넘게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 막내에게.. 난산 끝에 첫 아이를 낳고는 그 자식을 위해 얼마 전 시험관 수정에 성공한 막내에게...

오늘도 한 번씩 둘에게 전화를 했고 모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저녁이 깊어 더는 연락할 도리가 없는 시간.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다.

세상은 참 닮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난 전화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술될 뿐인 세상이 외려 편한 법. 복잡한 궤적을 남기고 움직이는 세상을 다만 서술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진도 앞에서 가라앉은 배를 향하는 마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변수는 아주 많고, 이러한 사건이 오랜 시간을 보낸 유럽에선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논리는 자명하다. 하지만 나는 무얼 설명하거나 이해하려 하기 보다 다만 피할 따름이다. 다만 빨리 잊고자 할 따름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의 피로를 감내하는 것이다. 서술하는 것도 피곤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지우고 싶은 세상에 살고 있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 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학교를 두고 갈등하다 하람에게

"벌써 하람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어떤 학교를 보내야 할지를 두고 많이 고민하고 있다. 집 앞에 신설된 학교는 아직 공사가 완결되지 못하고 막바지 정리 작업을 하느라 열심인 일용노동자들의 모습이 이른 새벽부터 눈에 띈다.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지만 이곳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을 모두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파트만 해도 모두 400세대가 넘는데 그 중 초등학교를 다닐만한 아이가 적게 잡아도 100명은 될 법하고 이런 아파트 단지가 바로 이웃에만 5개가 넘는다. 걸어 5분 거리에 초등학교가 새로 건설되어야 할 처지인 것이다. 여기서 차로 2-30분 가면 상황은 완전 반대다. 달서구와 접경에 놓인 달성군에는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중 학교 동창들이 아이들을 멀리 자기의 모교에 보내는 운동을 벌여 겨우 폐교 위기를 넘기고 미니학교로 탈바꿈하려는 학교가 하나 있다. 지난 해 12월에 이 학교를 다녀왔다. 방과후 활동으로 국궁이며 승마를 하고, 학교 앞 텃밭에서 아이들이 직접 배추며 무우 같은 것을 기르는 학교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학교 뒤 편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제법 울창한 소나무 숲이 담장도 없이 학교 바로 뒤 편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 학교가 차로 가더라도 30분 남짓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 스쿨 버스가 운영된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 아이를 그리 멀리 보내야 한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윗 글은 지난 1월에 쓴 글이다. 딱 두달간 계속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30분 거리의 학교로 마음을 잡았다. 두가지 생각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짜피 세상의 규격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면 어릴 적부터 하는게 맞다.'는 생각과 '아무리 중요한 것이 앞에 도사리고 있다 해도 아이의 현재 지금의 행복을 희생시킬 만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는 생각 사이의 갈등이었다. 사실 두 생각은 꽤 거리가 있는 생각이다. 한 사람의 뇌리 속에 이처럼 거리가 있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란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 미만한 이슈들이 거의 다 비슷한 형편이다. 마음을 어느 한 곳으로 정하기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놓쳐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례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많은 것이 명료해졌다. 아이가 지금 맛보는 행복, 맛볼 수 있는 행복, 유예할 수 없는 행복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자신을 만드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상상을 넓히고 자신의 우정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넓고 깊게 하고, 자신의 시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조금씩 확장시켜 가는 것' 그것은 주입을 통해 이뤄지는 교육으로는 아주 한정적으로 이뤄질 따름이다. 아이들은 자기또래 자기 바로 위아래 동무들과 같이 협력하면서 서로를 만든다. 바로 열심히 재미있게 놀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가운데 자연과 학교는 그들의 놀이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과 부모는 잘 놀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가다듬는 과정에 아낌 없는 조언을 해줘야 할 것이다. 갈등을 중재하여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람이건 자연이건 학교건 뭔가 두려움 때문에 거리를 둔다면 그것을 거둬주는 일에 앞장서고, 아이들이 발견한 의미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소통하는 일들이 선생님과 부모의 일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과 부모는 아이들의 동무이지 지도자이거나 감독자가 아닐 것이다. 
하람이는 아주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하루는 흙 장난을 하고 있는데 4학년 오빠들이 물을 한 양동이 길어 와서 놀이를 방해하나 했는데 외려 그 물로 반죽을 해서 무얼 만드면 더 재미있게 흙 장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고 즐거워 했다. 또 하루는 6학년 언니들과 도서관에서 같이 책을 나눠 읽고 좋은 책을 소개 받았다고 집에 들고 왔다. '프랜디'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읽을 만한 책인데 언니들 덕에 재미가 붙었는지 저녘 내내 그 책을 붙잡고 읽었다. 엄마와 아빠가 뒷 목이 빳빳할 정도로 고민한 보람이 있던걸까?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엄마는 이 모습을 보며 참 좋아한다. 마음을 무척 졸이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며 나 역시 이번 결정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아주 가까운데 있는 행복을 붙잡는데 이런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 적응하며 살기 위해선 여하튼 여러모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하람이의 책 하람에게

하람이가 한국에 와 유치원을 들어가면서 눈에 띄게 바뀐 것 몇 가지가 있다. 원복을 입어야 하고 모두 같은 가방을 들어야 하며, 셈이나 글씨 공부에 오전 한나절을 보내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독일에선 원복이나 공통의 가방이 없었고 공부라곤 일주일에 한두시간 그것도 알파벳을 익히기 위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던게 전부였다. 이것 말고도 바뀐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도서통장을 통한 책읽기 교육이었다. 하람이는 처음 몇달간 하루에 한권 혹 일주일에 두세권 책을 읽고 통장에 책제목을 적다가 연말이 되자 다른 아이들이 300권에 이르는 통장 목록을 빼곡이 채우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자기도 통장을 채우기 위해 하루에 10권씩 읽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렴' 그래 놓고 며칠이나 가나 보자 했는데 한달 내내 하루에 혹 10권 어떤 날은 20권까지 책을 읽어 나갔다. 한달을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되었다. '얘야. 넌 지금 그 책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알고 읽는거니?' 몇차례에 걸쳐 추궁을 하다가 그래도 말을 안듣고 계속 책을 읽자 그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말라고 꾸지람을 주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꾸지람은 어른들간의 다툼으로 이어졌고 늘 그러듯 엄마가 이 다툼의 승자가 되면서 결국 두달간 내내 하루에 10권 이상씩 책을 읽어 버린 것이다. 통장 하나가 아니라 두개를 다 채우고도 남는 책을 읽은 하람이는 이제 급기야 책을 쓰겠다고 나섰다. 자기 책이 그렇듯 그림책을 쓰겠다고 어제 꿈을 이야기로 만들고 그 이야기에 맞는 그림을 그려 6페이지 분량의 책을 썼다. '아는 언니와 길을 걷다가 이상하게 생긴 집이 나와 들어가보니 어두운 방 뒤쪽에서 마녀가 나타났다. 마녀는 우리 안에 여우 한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마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여우가 하람이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이 나라의 왕자인데 마녀가 나를 잡아 여우로 만들어 버렸어. 나를 구하려면 마녀를 죽여야해.' 불쌍한 왕자의 이야기대로 마녀를 없애자 여우는 왕자로 다시 돌아왔다.' 잘 아는 동화 몇 편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용이지만 나름 이야기가 되고 각 장면을 그린 그림은 내 마음에 들어 '좋은 책을 만들었구나' 하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왠지 계속 시무룩하다. 이유를 묻자 아까 엄마에게 나도 아빠가 낸 책처럼 이 것을 책으로 만들어 친구들이 읽을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했다가 그건 어렵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왜 내 책은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만들 수 없냐는 것이다. 투정이라 하기엔 자못 심각해서 가만 생각해 보았다. 하람이의 꿈이야기 더 나아가 아이들의 여러 이야기들이 묶여 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아이들의 일기나 동시가 출간된 것들은 몇 번 본 것 같은데 아이들이 만든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다만 아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여러 허황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점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강연 후기 과학자로 살기

내게 화학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담은, 무한한 형태의 구름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가 처음 화학의 문을 열고 그 안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던 시기, 대학을 들어 가기 전 그가 마음에 품었던 바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 "이 구름은 번쩍이는 불꽃에 찢기는 검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내 미래를 에워쌓는데, 마치 시나이 산을 어둡게 둘러싼 구름과 비슷했다. 모세처럼 나도 그 구름 속에서 내 율법이, 나의 내부와 내 주변, 세계의 질서가 드러나 주기를 기다렸다." 나를 포함한 세상의 본질과 그 안에 담긴 질서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갈망이 16세 소년의 마음을 온통 휘 감고 있다. 

지난 12월 한달 동안 7군데의 고등학교를 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모두 일반고였다. 혹은 강의를 선택하여 들어 온 학생들이었고 혹은 무작위로 한반 내지 두반의 학생들이 모두 들어온 경우였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 많은 우려를 했던게 사실이다. 경쟁 위주의 학교에서 한 점이라도 더 높게 받기 위해 많은 것들을, 아니 거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상상했다. 그들은 이제 무언가 더 이상 질문해야 할 이유를 상실한 아이들로 상상했다. 그런데 강연을 거듭할수록 그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앎에 대한 열망, 불분명한 세상을 알고자 하는 순진한 열망, 이러한 열망은 살아 있는 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각 증세와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은 많은 경우 아픔과 절망, 회의 등과 함께 마음에 자리잡기 일쑤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그들의 삶에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르거나 그대로 복종해야 할 것들이 태반일 것이고, 그러한 복종을 통해 체득하게 되는 질서와 규율은 그리 자연스러운 것들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가는 과정, 즉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먼저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절망이나 회의 등이 안개처럼 깔린 그들 고민의 등 뒤에서 나는 순진무구한 열망을 본다. 나를 비롯하여 나를 둘러싼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과 그 안에 담긴 질서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 크눌프의 방랑처럼 얼마나 쓸모 없어 보이는 열망인가? 하지만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이는 그들에게 지극히 무해한 것들이다. 그리고 오로지 이러한 열망만이 그 대상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그 대상들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로부터 밝은 가능성을 본다. 나의 살아 있는 후배들이 그들의 삶에 대해 던지는 순진무구한 질문과 그것의 배후에 도도히 존재하는 앎에 대한 열망을 바라보며 경탄한다. 삶이란 이처럼 힘이 센 것이구나 싶기 때문이다. 마치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그들의 삶이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육을 생각한다는 것 하람에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그러니까 이념을 넘어 논리를 넘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교육'을 꼽는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오덕 선생을 존경했고, 같은 마음으로 김규항 선생을 귀하게 여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살면서 모두 예외 없이 끊임 없이 배우며 살아간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가는 것을 삶이라 정의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마음을 닫고 배울 기회를 스스로 봉쇄하는 불량 학생이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경험은 가르침이 온전해질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목적을 '상품성'의 함양에 두지 않고 '인간성'을 키우는 것이라 할 때 역시 이러한 명제, 즉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거론할 나위 없이 크다. 교육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 이러한 명제는 실현 불가능해지기 십상이다. 교육 과정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가르치게 되고 배우는 사람은 늘 교육의 객체로 자신을 한정하게 된다.
나는 가르치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야말로 교육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나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이러한 경험을 나누는 과정이다. 내가 하람이와 같이 놀거나 같이 공부할 때 얻게 된 많은 깨달음들 이를테면 '어떻게 호기심이 발생하고 키워지는가?', '사물에 대한 인지와 그것에 대한 애정이 맺는 관계', '주위 사물들 즉 생물들과 무생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맑은 통찰과 그것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야', '배워 얻게 된 지식의 효용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 같은 것들은 나로 하여금 교육을 주고 받는 관계로 생각토록 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계 속에 교육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부모가 그 끊임없는 관계를 잊어 버렸다면 사실 교육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아이들이 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것 역시 똑같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그 가운데 배우고 가르친다. 그 속에서 배우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법을 배운다. 동무들과의 관계를 상실한 아이들이 배움에 익숙치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사교육'의 부정적인 측면을 여러가지 지적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아이들이 부모나 다른 동무들로부터 배우고 가르칠 기회를 잃어 버리는 것이라 확신한다.

김규항선생이 추진하는 '부모 서명운동' 중간본이 그의 블로그에 올라와서 아래 옮겨 보았다. 내용이 앞서 말한 나의 생각과 아주 많이 일치하여 기쁜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동참할 생각이다.  

부모의 10가지 약속

내 아이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지금, 약속합니다.
 
1.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귀한 인연을 맺은 독립적 존재입니다.
2. 아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행복이 뭔 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3. 아이의 미래 행복을 위해 현재 행복을 빼앗지 않습니다.
4. 교육은 아이의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5. 돈은 아이의 인생에서 생존의 조건이되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6. 아이는 동무와 어울려 잘 놀아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으로 자랍니다.
7. 아이가 몇 등인가 보다 왜 공부하는지 , 뭘 공부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8. 사교육과 대학 진학 여부는 아이와 민주적인 대화를 통해 결정합니다.
9. 아이의 직업 선택에 내가 가진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10. 교육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늘 참여합니다.

부모 서명운동 하람에게

부모 서명운동 실천 항목 설문


김규항 선생의 블로그에서 아래 설문 항목을 보고 답을 해 보았다. 아주 투명하게 바르고 정확한 말들이라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것 같아 그 내용을 옮겨 보았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http://gyuhang.net/으로 들어가시면 참여할 수 있다.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에서는 교육 현실이 바뀌려면 부모가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부모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아래는 10개의 항목 초안. 고래이모 삼촌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수집하고 있다. 고래이모 삼촌이 아닌 분들 가운데 의견이 있는 분은 맨 아래 '초안에 의견 내기' 링크를 이용해주시면 된다.

1. 오늘 행복한 아이가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2.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귀한 인연을 맺은 독립된 존재입니다.
3. 아이는 (동무와 어울려) 잘 놀아야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4. 돈은 아이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5. 모든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함께 돌볼 때 모두가 행복해 집니다.
6. 교육의 목표는 ‘얼마짜리 인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에 있습니다.
7. 아이가 몇 등을 했는가보다는 아이가 왜 공부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8. 대학은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으며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9.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은 아이와 의논하여 함께 결정합니다.
10. 아이의 직업 선택에 있어 부모가 가진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설문에 대한 나의 답:

1. 오늘 행복한 아이가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1-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반론을 생각해 보았지만 거의 명제에 가까운 옳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2.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귀한 인연을 맺은 독립된 존재입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2-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3. 아이는 동무와 어울려 잘 놀아야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3-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4. 돈은 아이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4-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5. 모든 아이를 내 아이라 여기고 함께 돌볼 때 모두가 행복해 집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5-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6. 교육의 목표는 얼마짜리 인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에 있습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6-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논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교육의 목표를 '키운다'는 관점에서만 보면 아이들이 교육 과정에 주체로 참여한다는 내용을 담아내기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육 과정에서 아이들로부터 받는 피드백은 단순히 교육 행위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주체적 참여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 의식을 전제하고서 하신 표현이겠지만 조금 부족한 표현이 아닌가 해서 말씀드립니다.


7. 아이가 몇 등을 했는가 보다는 아이가 왜 공부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7-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8. 대학은 갈 수도 안갈 수도 있으며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8-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9.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은 아이와 의논하여 함께 결정합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9-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10. 아이의 직업 선택에 있어 부모가 가진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

· 전혀 적합하지 않다

· 별로 적합하지 않다

· 적합하다

· 매우 적합하다

10-1. 위 항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만일 편견이 있어 이를 강요한다면 분명 그릇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때 그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와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는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가 그 역할에 절대적이라는 것 역시 잘못된 편견이자 집착이겠지요. 다만 그 가운데 부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특히 부모는 아이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장 과정을 통털어 지켜보고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미래를 계획할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제안이 담기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10항의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부정적인 표현만으로 그치기에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의견을 개진합니다.


11. 위 10개 항목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이나, 추가로 제안하시고 싶은 항목이 있다면 적어 주세요.
사교육과 관련하여 논의할 때 꼭 개진하고 싶었던 의견이 있습니다. 학교에서의 교육을 제외하고 그 다음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할 곳은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고등과정의 난해하고 전문적인 내용의 공부를 부모가 가르치거나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공부의 내용을 부모들이 알고 아이들과 교류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동기 부여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교육이란 사실 이런 부모의 책임을 돈으로 해소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사교육에 들어갈 돈 만큼의 시간을 아이들과 같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더 현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적어도 초등학교의 전과정에 대해서는 부모가 아이들이 공부하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같이 공부하는 자세로 아이들과 공부에 대해 심도 있고 제대로 된 교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개의 항목 가운데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항목이 없는 것 같아서 의견 개진합니다.


4699만 단상들

처음 이 숫자를 보고 통증이 밀려 왔다. 머리에선지 뒷목에선지 가슴에선지 정체모를 곳으로부터 작지만 꾸준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마도 많이 짜증이 나면 이럴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많이 시니컬해져서일지도 모르겠고, 아마도 많이 절망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15세 이상 남자의 숫자는 어림잡아 2011년 현재 1,800만명이다. 그냥 산술적으로 계산하자면 이 사람들이 일년 동안 2.5번의 성매매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한겨레21의 기사가 기초로 한 것은 여성가족부 주관의 전수 조사 결과이다. 신뢰도 있는 기관의 조사이니까 억지로라도 믿어야 한다고 마음으로 되뇌이면서도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니..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업그레이드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껏 너무나 순진하고 나이브하게 사회를 바라봐 왔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는 기회가 나이가 들수록 자꾸 늘어간다. 공교롭게 집문제나 교육 문제와 같은 다분히 공적인 영역의 문제들이 주로 그 기회를 제공해왔다. 그런데 오늘 너무도 확고한 다른 사실 하나를 접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성이 상품으로 아주 광범위하게 대규모로 일반적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기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성이 거래되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거래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거래는 단지 성을 상품으로 사고 파는 장본인들만의 거래가 아니다. 한겨레 21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강남 일대에 퍼져 있는 수백군데 룸쌀롱 근처 각양 각색의 상권 역시 그 주범이다. 인근에 산재한 옷가게, 여관, 미장원, 술집, 음식점 그들은 성매매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성매매 단속에 거세게 저항하는 주력에 속한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포털, 방송을 통해 도배되다시피 한 선정적인 기사와 광고와 제안과 거래들은 어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열어본 포털 메인에 실린 기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xx, 도발적인 깜짝 입맞춤.', 'xxx, 일서 포르노 배우...', '도발적인 그녀', '야한 의상..','연사로 찍은 아찔한 하의 실종' 매일 조금씩 달라질 뿐인 이런 류의 기사들이 거의 도배되다시피 한 인터넷, 그리고 그것과 순환고리를 만들어 심도를 더 하거나, 디테일을 보여주는 갖가지 방송 프로그램. 멀쩡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면 도대체 얼마의 거리를 이것들로부터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여지는 사회가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짜 모습인가? 아마도 통증이 몰려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처럼 일상적으로 알게 모르게 성을 상품화하고 욕망을 증진시키고 왜곡시키고 분출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성과 관련된 강력 범죄가 빈도와 정도를 심화시켜 가고 있고, 관련자들의 연령대가 내려 가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부터 연원한다. 이미 사회에 안개처럼 미만하게 퍼져 있는 성이라는 상품은 '자연인으로서 인간이 지니는 속성으로서의 성'의 의미와 가치를 전도시키고 있고, 왜곡시키고 있고, 혼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럼 누가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가? 사회의 기성인들, 그가 블루 칼라건 화이트 칼라건, 사회적 지위의 고저와 무관하게, 부의 정도와 무관하게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맞추어서 상품을 만들고 구매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한다. 사회 지도층들은 끊임없이 성과 관련된 로비와 접대를 즐기고 있고, 학자들은 학회가 끝난 후 뒷풀이를 룸쌀롱에서 한다. 장삼이사 남자들의 2차는 대부분 성매매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4699만이라는 숫자에 언젠가는 무감해질 날도 오겠지.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너무 아파온다. 못되고 못난 아비 어미를 둔 죄로 그들이 짊어 져야 할 짐들의 목록 가운데 '상품화된 성'과 관련된 우리의 탐욕과 수치심과 엽기적이고 뒤뜰린 갖가지 사회병리현상이라는 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을 보는 시인의 눈 나의 시 나의 호흡

종로오가

이슬비 오는 날,
종로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 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 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 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 낸 이마엔 세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은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 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 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 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송경동 시인이 신동엽 창작상을 받으며 말한 창작 소감에 신동엽의 '종로오가'라는 시의 한 구절이 담겨 있어 그 시의 전문을 옮겨 보았다. 다시 읽어 보니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내용들이 보인다. 아니 핵심은 그대로다. 마치 전태일의 뒤를 김주익이 잇고, 또 그 뒤를 김진숙이 잇는 것 처럼... 정말 보수의 승리를 이보다 더 웅변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래 내용은 송시인의 수상 소감 전문이다.


칠흑 같은 밤, 맨발로 빗속에서 낯선 주소를 묻는 아이처럼

다섯 달 수배 생활을 마치고 자진해 들어 온 부산서부경찰서 유치장.
첫날, 관식이 무척 맛있어 진짜 이번엔 사는가 보구나 했습니다.

그간 기륭전자, 용산참사 사건 등으로 세 번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와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엔 꼭 몇 개월이라도 살다 나가겠습니다.

근 몇 년 넋이 빠져 살았습니다.
어느 땐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평택 대추리 어르신들 곁이었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67일째, 94일째 굶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용산4가 다섯 분의 시신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이번엔 내가 기륭전자공장 앞
포클레인 붐대 위에서 죽겠다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가 폭우를 맞으며 목발을 짚고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제가 무슨 고민이 깊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탁발한 시인의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한편, 가끔 시인들은 넋이 좀 빠져 저 세상으로도, 이 세상으로도
좀 왔다 갔다 해야 제 맛인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하튼, 거의 사회적으로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으로 낙인찍히던 때
구사일생으로 창비와 신동엽 선생님께서 저를 다시 시인으로 호명해 주셨습니다.

오전엔 체포영장 발부 소식을,
그리고 오후엔 수상 소식을 듣게 되는 기가 막힌 날.
오전 체포영장 소식도 덩달아 무슨 큰 상 소식처럼 들리던 날,
오후 수상 소식이 오히려 엄중한 탄압으로 느껴지기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고, 쓰겠습니다.

신동엽 선생님의 시 <종로5가>에 나오는 칠흑 같은 밤, 맨발로 빗속에서 고구마 한 자루를 메고 낯선 주소를 묻는 한 시골아이처럼,
장총을 곁에 세워두고 어느 바위 곁에 누워 곤히 잠든 한 동학농민군처럼 그렇게,
조금은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NHS-내 몸에 대한 책임 과학자로 살기

오마이뉴스에서 영국의 의료시스템인 NHS에 대한 연재를 하고 있다. '의료민영화'와 '무상의료'라는 두 다른 극단을 두고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연재를 한번 봐두면 참 좋을 것 같다. 영국에서 6년을 살면서 나 역시 NHS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거기에는 제도에 대한 칭찬이나 비판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만든 제도이니 만큼 문제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NHS의 기본 정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기본 정신 중 하나는 오마이뉴스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의료를 보편적 복지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모두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비교의 대상도 될 수 없고 경중이 있을 수도 없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살아 남는 권리'이다. 국가가 기본부터 살피기를 힘쓴다면 당연히 생명권의 보장을 헤아리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명권의 핵심을 살리는 의료 행위를 국가가 관리하는 복지 개념에 집어 넣은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나는 NHS가 이러한 기본 정신 외에 또다른 기본 정신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에서 다루지 않은 듯하여 언급하고자 한다.(모든 연재를 다 보진 못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료행위의 주체 속에 질환을 앓고 있는 장본인인 환자를 포함시키는 정신이다. 나는 한국의 의료 행위를 가끔 경험하며 이러한 측면에서의 큰 차이를 아주 크게 실감하곤 한다. 영국의 GP(General Practitioner)를 보통 한국의 가정의나 일반의와 상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실제 진료를 하는 범위나 정도를 두고 보자면 비슷할수 도 있지만 다른 점은 GP의사들의 주된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 내가 지닌 경험이나 NHS문헌 등에서 참고한 내용이나 할 것 없이 GP의사들은 예방과 교육을 아주 주된 임무로 가지고 있다. 작은 질환이 큰 질환이 되지 못하도록 손을 쓰거나 전염병이 돌 때 이를 차단하기 위해 백신 접종을 함으로써 질환의 정도나 확산 등에 대한 통제를 일선에서 하는 일을 한다. 이는 영국처럼 모든 인구가 예외 없이 어느 특정 의사를 주치의로 선택하는 영국의 시스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둘째 GP의사들은 병증을 호소하는 환자와 대화를 하며 질병과 그에 대한 관리 지침에 대한 교육을 수행한다. 한국의 병원에서 '한 사람의 의사가 한 사람의 환자를 대하는 시간이 1분 미만이다.'라는 사실은 환자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한 문제는 환자에 대한 교육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이 앓는 질환 가운데 의사의 처방과 투약을 통해서 치유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근 15년 이상 신약 개발에 몸담고 있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써 이 질문을 자주 던져 보았다. 그 비율을 정확히 계산할 수야 없겠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비율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질환은 의사의 처방과 투약 없이 치료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의사의 처방과 투약이 결정적으로 치료를 완료해주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아주 좋은 예가 감기이다. 피토르나바이러스과에 속하는 리노바이러스에 의해서 주되게 발병되는 감기는 사실 치료제가 없다. 증세가 생기고 3-4일 푹 앓고 나면 낫게 되는 질환이다. 문제는 이러한 질환에 대처하는 방법인데 감기 증세가 있음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속 무리를 하거나 폭음을 하거나 하다 보면 몸의 면역 기능이 바이러스를 퇴치시킬 만치 강하지 못하게 되어 바이러스가 체내에서 보다 기승을 부리게 되고, 그 휴유증으로 2차 감염 같은 것이 발생하면 급성 염증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감기에 걸리면 많은 물을 먹어서 발열 증세에 대처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몸의 면역 기능을 최적화시키고, 방안을 청결히 하거나 통풍을 잘 시켜 다른 감염의 빌미를 줄여야 한다. 바이러스는 공기를 통해 옮기는 것이므로 감기가 많이 돌고 있을 때에는 비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감기 기운이 있어 GP의사를 만나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모두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현대인의 필수 교양들이다. 과학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우리 자신을 바로 알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라 했을 때 현대 의학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는 우리 몸에 발생하는 질환들에 대해 원인부터 대응법까지 차근차근하게 교육을 통해 공유하는 것일 것이다. 보통 의료 행위를 의사가 환자에게 베푸는 일방적인 행위로 이해하는데 이는 아주 그릇된 것이다.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듯이 우리 몸의 주인은 각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개선시켜 나가야 할 임무가 바로 현대 의학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있던 MRC-LMB 바로 맞은 편에 아덴부룩스 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 들어가는 정문 초입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아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말이지만 요즘 우리나라 어려운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뒤 돌아 보며 나의 시 나의 호흡

눈 내린

겨울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이 다 길인 것도 같고

사방이 다 길이 아닌 것도 같다.

 

인가를 찾아

내려온 길목마다

높이 쳐진

울타리.

 

잠시 지쳐

뒤를 본다.

 

하얀 눈

그 위로 나 있는

검은 발자국.

 

내가 걸어 온 흔적마다

햇살

눈부시게 담겨 있다.

 

그 안에 생명

와락 내게 안긴다.
 

울타리 너머

아이 하나

웃고 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거친 바람처럼 밀려와 내 안의 많은 것들을 부숴 버렸다. 마음을 자꾸 부리지 않고 가만히 가라 앉혀 보고자 애를 써 보았지만 가라 앉기 보단 무너져 내렸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만치 마음이 상해 버렸다. 그러나 생명은 물처럼 흘러 내려 간다. 사랑하는 딸 아이를 바라보며 기운을 낸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잊어 버린게 있다. 바로 나의 생명 나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흔적이다. 지나온 날들의 흔적. 어떤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나의 행위, 생각, 관계, 작고 큰 모든 나의 과거의 행적이 고스란히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나와 내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들과 주위의 생물들과 온갖 무생물들이 협력하여 이뤄 놓은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같은 생각을 이어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을 이루고 있던 것들의 몇 할이 나로부터 인한 것일까?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일 것이다. 나는 그 몇 할을 통해 아버님을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받아 들여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간에 우리 모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주위 사람들과 주위 사물들과 나누며 살고 있다. 내가 나를 뒤 돌아 본다는 것은 이처럼 온갖 군데 산재해 있는 나의 모습을 차분히 들여다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내 안에 담긴 다른 존재들의 흔적을 차분히 살펴 보고 어루만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는 다는 것의 미덕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뒤돌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잊고 지내온 나 자신을 어루만져 주고 감싸 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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