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어떤 나라 - 고병권 단상들

어제 올린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에서는 다분히 내가 유튜브를 보고 잠시 떠올린 착잡한 인상을 언급하는데 그쳤다. 거기에 더 부연하려다 보니 내가 빈라덴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다 지금 미국에 있는 고병권 선생의 글을 발견하고 허락을 받아 여기 실어 놓는다. 늘 그러듯 핵심을 정교하지만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이어서 참 좋다.


지상의 어떤 나라 - 고병권

1.
미국 온 지 한 달 쯤 되던 날, 온풍기 표시등이 고장 나서 온도 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잘 안 되는 영어로 간신히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는데, ‘무슨 문제냐’는 내 물음에 직원은 ‘other countries, the rest of the world’에서 온 사람들이 섭씨와 화씨를 착각해서 기기를 함부로 눌러 대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아주 선한 얼굴을 하고 장난 끼도 있는 나름 정감있는 아저씨였다. 그때 내 목구멍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임 쏘리’가 나오기 시작했다(사실 난 이제 막 이사를 한 터라 그걸 만진 적도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 미국학 전공자인 크로아티아 출신 룸메이트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시스템을 쓰는 나라는 당신 나라 밖에 없다. 그리고 ‘the rest of the world’를 함부로 말하는 나라도 당신 나라 밖에 없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난 거의 입술까지 나온 ‘아임 쏘리’를 틀어막았고, 이번엔 서비스센터에서 온 아저씨가 얼굴을 붉히며 ‘아임 쏘리’를 연발했다. 영하를 간신히 넘긴 날씨에 수리를 마친 온풍기에서 따뜻한 바람이 막 나오던 찰나였는데 그만 냉풍이 확~.

선한 아저씨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룸메이트에게 너무 심하지 않았냐고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분위기만 냉랭해졌다고. 그러자 그는 곧바로 말했다. “정신 차려. 미국은 항상 그런 식이야. 한국이든 크로아티아든 아무런 상관도 없지. 우리는 그냥 ‘the rest of the world’라고.”


2.
며칠 후 빈 라덴이 죽었다는 소식이 특보로 전해졌다. 오바마의 심야 연설에 따르면 교전 후에(after a firefight) 빈 라덴을 사살했으며, 미군은 다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네이비씰이 멋지게 해낸 걸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조금 다른 내용이 전해졌다. 빈 라덴은 비무장상태에서 딸이 보는 앞에서 사살되었으며, 이는 백악관에 생중계되었고, 미군은 빈 라덴의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고.

저녁에 몇 사람이 모여 이러저런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화제는 빈 라덴이었다. 나는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축하한다는 걸 신문 일면에 내고 환호하는 건 거북했다고 했다. 그러자 맞은편의 친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놈은 수많은 미국인을 죽인 테러리스트잖아. 잡거나 죽이거나(catch or kill), 이미 수배전단을 뿌려놓았다고.” 그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내 얼굴을 봤지만, 그의 말 중 당연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죽일 놈은 그냥 그 자리에서 쏴 죽이면 된다는 거네.” 우리 대화를 듣던 내 룸메이트 크로아티아 할아버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이 할아버지 참 예민하다. 그는 비꼬며 말했다. 지난 유고 내전 때 미군에 잡힌 크로아티아 장군들은 지금 헤이그에서 전범 재판을 받고 있다고. 미국이 그들에게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정의를 실현하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빈 라덴처럼 그냥 쏴 죽이면 될 텐데.

입장을 살짝만 바꾸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왜 많은 미국인들이 알지 못할까. 가령 어느 나라가 적으로 선언한 인물이 미국에 들어가자 그 나라가 미국의 허락없이 군대를 상륙시켜 ‘적’을 사살해버리고 그 시신을 바다에 버리고 간다면 미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왜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그런 사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미국은 입장을 바꾸어 볼 필요가 없다. 미국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만한 나라가 지상에 어디 있어야지 말이다. 미국에 군대를 상륙시킬 생각을 할 나라는 지상에 아직 없다.


3.
빈 라덴이 사살되기 며칠 전 <위키리크스>는 관타나모기지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빼내 폭로했다. 거기에는 최소한 15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재판 없이 수용되어 있다고, 그 중에는 89살 먹은 노인도 있고 14살 먹은 소년도 있다고 했다. 사미 알하지라는 저널리스트는 6년간 투옥되었는데 문서에 따르면, 테러혐의보다는 그의 회사인 ‘알 자지라’의 방송통신장비나 교육프로그램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재판없이 그렇게 그냥 가두어 두는 것이다.

그런데 빈 라덴이 죽자 한동안 미국의 치부처럼 보였던 관타나모의 가치가 급부상했다. 수용소를 두기를 얼마나 잘했느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미국 정부는 부인하지만 일부에서는 빈 라덴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각종 고문이 큰 효과를 냈다고 주장한다. 피터 킹 의원은 빈 라덴 체포에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를 물고문해서 얻어낸 정보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의원은 노골적으로 “이제 오바마 대통령이 물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관타나모, 특별송환제도(미국에서 직접 고문하는 게 부담스러울 때 다른 나라에 넘겨 대행케 하는 일종의 외주 시스템으로 이용된다), 정보수집을 위한 각종 고문들. 부시정부에서 마련된 이 모든 것들 덕분에 이번에 오바마가 덕을 본 거라고, 그러니까 이런 것들 덕분에 정의가 실현된 거라고 다들 너무 노골적이다. 조금 감출만도 한데, 너무 자랑스럽게 그것을 내세우니, 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어딘가에 숨고 싶다.

4.
엊그제부터 또 다른 화제 거리가 생겨났다. 빈 라덴을 지칭하는 작전명이 ‘제로니모(Geronimo)’였던 모양이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백악관에서 오바마를 비롯한 스탭들에게 생중계된 ‘살인 리얼리티쇼’에 특수부대원들이 이런 보고를 한 모양이다. “우리는 제로니모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 다시 보고가 올라왔다. “제로니모 EKIA(적 사살).”

그런데 제로니모는 19세기 미국에 맞서 싸우던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지도자였다. 침략자 백인들에 맞서 싸우다 붙잡혀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던 지도자를, 자신이 사살할 테러리스트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군은 현재의 빈 라덴을 죽이면서 그들이 과거에 죽인 네이티브 아메리칸 지도자를 다시 확인 사살한 셈이다. <위클리 수유너머>에 해외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베이랑(Beilang) 선생은 내게 이 ‘제로니모’ 사건이야말로 미국 군대가 자기 전통을 어디서 찾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했다. 미국 군대는 침략자를 가차 없이 무찔러왔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침략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미국은 역시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은 나라였던 것이다.

5.
미국이라고 불리는, 지상의 어떤 나라가 있다. 지금 이 나라는 ‘정의가 실현되었다(Justice is done)’고 연일 난리다. 난 내일부터 또 이주노동자들의 영어 학습 프로그램에 나간다. 누구는 티벳, 누구는 중국, 누구는 태국, 누구는 포르투갈, 누구는 스페인, 누구는 버마, 또 누구는 한국에서 왔다. 길게 늘어놓았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모두 ‘the rest of the World’에서 온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영어 선생님께 물어봐야겠다. 미국식 영어에서는 ‘Justice is done’과 ‘Justice is gone’이 같은 말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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